TM MAGAZINE 2026년 11월 3일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방랑기』만이 나는 아니야'
하야시 후미코의 『방랑기』를 나루세 미키오가 영상화한 한 편. 다카미네 히데코가 연기하는 하야시 후미코는 아무리 거절당해도 오로지 계속 쓰고 계속 발표했다. 나루세는 축하연 장면에서 단숨에 만년으로 옮겨 가 신격화된 작가상을 무화하고, 살아 있는 하야시 후미코를 일으켜 세운다.
이번 주는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1962)입니다.
『사상의 숲』에서도 소개했듯, 이 작품은 작가 하야시 후미코의 『방랑기』를 영상화한 것입니다. 『방랑기』는 여러 번 영화화되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것은 나루세의 작품입니다.
나루세는 문학 작품을 영상으로 변환하는 문화 기술이 매우 높았던 영화인입니다. 그 영화인과 하야시 후미코를 연기한 다카미네 히데코(高峰秀子)의 배우 기술이 훌륭하게 합쳐지고, 게다가 주위를 받치는 다나카 기누요(田中絹代), 가토 다이스케(加東大介), 이토 유노스케(伊藤雄之助), 다카라다 아키라(宝田明), 구사부에 미쓰코(草笛光子), 고바야시 게이주(小林桂樹)를 필두로 뛰어난 배우들의 문화 자본이 조화를 이루면서 훌륭한 작품으로 빚어내고 있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하야시 후미코의 『방랑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추체험할 수 있습니다만, 제가 이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사실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미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넘은 하야시 후미코가 어떻게 그 지위에 이르렀는지를 거꾸로 영상 문맥의 쪽에서 제기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작품의 특징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세상 사람들은 작가나 크리에이터로서 성공한 사람을 보면 그 화려한 한순간이나 성공한 모습만 볼 뿐,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경위와 맥락까지 이해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누구에게나 고생한 시기가 있다, 누구에게나 보답받지 못한 불우한 시절이 있다는, 자신을 안이하게 위로하는 재료로 보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지위에 있는 분들이 그때까지의 삶에서 어떻게 살아왔는가. 어디서 고투하고, 어떻게 극복하고, 그리고 지금도 무엇과 싸우고 있는가. 그것을 ‘안다’는 의미에서, 선인의 맥락을 이해하는 시선이 저에게는 중요합니다.
『방랑기』는 바로 그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어린 하야시 후미코는 부모의 사정으로 각지를 떠돌았는데, 그 후에도 방랑벽이 가시지 않아 도쿄에서 카페 여급 등 직업을 전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쓰기를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가진 돈을 시집에 쏟아붓고, 시도 동화도 산문도 쓰고, 보수를 받지 못해도 발표할 수 있다면 하며 작품을 잇달아 세상에 내놓고, 누구의 눈도 신경 쓰지 않고 누구에게도 사양하지 않고 오로지 계속 쓰고 오로지 계속 발표했습니다. 아무리 거절당해도 끝까지 자기 작품을 믿은 한 인간의 모습이 여기에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결과적으로 『방랑기』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이 작품이 높이 평가되어 그녀는 단숨에 세상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성공한 작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지만, 그래도 그녀는 쓰기를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나루세가 훌륭했던 것은 『방랑기』가 평가받은 축하연 장면에서 단숨에 만년의 하야시 후미코로 장면을 옮긴 구성입니다. 대개는 그 축하연 장면에서 해피엔드가 되겠지만, 여기서 하야시 후미코를 연기한 다카미네 히데코가 하는 말이 여운을 만듭니다.
“쓰지 않으면, 하야시 후미코는 『방랑기』밖에 못 쓴다고 하겠지. 『방랑기』만이 나는 아니야, 『방랑기』만이 나는 아니라고.”
이 대사로 인해 이 작품이 이 장면을 기점으로 삼고 있었음이 떠오르고, 보는 이가 그때까지 품고 있던 ‘하야시 후미코’라는 신격화된 작가상이 무화되어 갑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무화된 맥락에서 일어서는 것은 살아 있는 하야시 후미코의 모습이었습니다.